잊혀진 페이지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휴대폰이 울렸다. 다음 미팅 장소로 이동하는 사이, 새로운 계약에 대한 이메일 세 통을 처리해야 했다. 점심은 시간이 없어서 서둘러 샌드위치 한 조각으로 때웠다. 몇 입 베어 물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왔고, 씹던 걸 겨우 삼키며 전화를 받았다. "혹시 이번 주 안에 다 끝내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가 조금 다급해서..." 다음 주까지 이번 계약을 마치고 최대한 빨리 새로운 상품을 내보내야 했기에 이번 주는 아주 바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새로운 메일 알림이 떴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손은 자동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젠 피곤하다는 감각조차 둔해진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익숙한 거리, 익숙한 건물들. 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젠 낯설게만 느껴졌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손을 맞잡고 길을 걷는 연인들, 한적한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는 노인. 저들의 시간이 나와는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르는 것 같았다.
'나도 한때는 저랬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주말이면 친구들과 만나 영화도 보고,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던 시간이 사라진 게. 휴대폰을 켜서 통화 목록을 훑어봤다. 최근 기록에는 상사의 번호, 거래처 사람들, 그리고 비서의 연락뿐이었다.
그때였다. 화면이 꺼진 순간, 문자가 하나 들어왔다.
"이번 주말에도 출근 가능하죠?"
비서의 메시지였다. 주말. 주말이라니.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일해야 하는 날이었다. 머뭇거리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네."
한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부모님과의 마지막 통화가 언제였더라. 아버지 생신 때? 아니, 그땐 메시지만 보냈던 것 같기도 했다. 친구들과는 더더욱. 한때는 매일같이 연락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안부조차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차가 신호에 걸려 잠시 멈췄다. 그때였다. 문득 눈에 익은 간판이 들어왔다.
"책벌레서점"
내가 어릴 적에 친구들과 같이 주말마다 만화를 보러 가던 서점이였다. 한 20년 전 기억이지만 내 머릿속에 아주 또렷히 남아있었다. 냄새를 좋게 하려고 둔 양초를 넘어뜨려서 서점을 다 태울 뻔한 날, 내가 잘못해서 책의 페이지를 찢어서 폴로 붙여야 했던 날, 20년이 지난 후에도 아직도 이 서점이 남아있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오랫동안 보질 못해서 이미 문을 닫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 페인트로 손수 칠해진 간판을 자랑스럽게 달고 있었다. 순가, 가슴 한쪽이 저릿해졌다.
예정에도 없던 행동이었다. 차 문을 열고, 날카롭게 울리는 경적 소리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 서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서점을 향해 갈 때마다 서점에 대한 추억이 하나씩 떠올랐다.
서점 앞에 아주 늙은 이제 앞을 보지도 못하는 것 같은 늙은 개가 앉아있었다. 개는 아주 늙었지만 그래도 대담하게 서점 앞에 서서 서점을 지키고 있었다. 몇십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근엄함을 잃지 않은 게 눈에 보였다. 내가 서점에 갈 때마다 나한테 달려오면서 안기던, 바로 그놈이었다.
"보리야!"
처음에 보리는 날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곧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나한테 힘차게 달려와서 안겼다, 마치 왜 이렇게 오랫동안 오지 않았냐고, 보고 싶었다고 인사하는 듯이.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기뻤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먼지가 수북히 쌓인 전구로 밝혀진 책들 사이로 걸어갔다. 새로운 책은 전혀 없는 듯했다. 모든 곳에 나와 친구들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내가 벽을 돌로 긁어서 새긴 이름, 책에 낙서를 한 흔적, 모두 다 없어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날에는 성벽 같이 높았던 나무 책장 사이를 지나가면서 내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실감이 들었다.
책들을 살펴보다 책장 맨 위에 숨겨져 있던 것 같은 책이 보였다. "나는 커서 뭐가 될까?", 뭔가 알 수 없는 전율이 내 몸을 타고 흘렀다. 아주 익숙한 표지였지만 이런 책을 내 인생에서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책을 펼쳐서 한장 한 장 넘겨보다가 118페이지에서 멈춰 섰다. 책 중간에 한 10살짜리 아이가 쓴 것 같은 필체의 손편지기 있었다. 갑자기 낯설지만 익숙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였다. 손끝은 저릿했고 가슴은 마치 지진이라도 생긴 듯이 쿵쾅거렸다. 오래된 종이가 손끝에서 바스락거리며 열렸다.
"미래의 나에게..."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중에 돈 엄청 많이 벌거지? 그러면 엄마 아빠랑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꼭 행복하게 살아야 해!"
눈앞에 글씨가 흔들렸다.
뭘 해도 행복하게만 살기, 그건 한때 내 꿈이였고 약속이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바빴고, 지쳤고,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연필로 쓴 글씨 위로 눈물이 뚝하고 떨어졌다.
그 편지는 단순한 종이쪼가리가 아니였다. 그것은 잊혀진 꿈이었고,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부모님 번호를 눌렀다.
뚜... 뚜...
벨 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슴이 조여왔다.
‘받아 주세요... 제발...’
뚜... 뚜...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게 언제였는지, 마지막으로 함께 밥을 먹은 게 언제였는지.
뚜... 뚜...
손에 힘이 풀렸다. 귀를 찌르는 정적.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눌러봤다. 같은 안내음. 같은 정적.
숨이 턱 막혔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원래 내가 학교에 냈던 이야기지만 학교에서는 이미 까먹은 듯 하니 그냥 기억을 위해 올리기로 했다. 거의 반을 챗지피티가 썼지만 아이디어만큼은 내가 냈다.)